최초의 정규 유격대 백골병단

한국전쟁 당시, 적진 한복판에 침투해 60일간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647명이 출발했지만, 364명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조국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군번도, 계급도, 그 어떤 보상도 없이

오늘은 대한민국 최초의 정규 유격대, ‘백골병단’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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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입니다

육군본부는 적 후방 침투와 정보 수집을 위해 특수부대 창설을 결정합니다

‘백골병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실제로는 연대급 규모였지만, 적을 속이기 위해 집단군급 명칭인 ‘병단’을 사용한 것이죠

체력, 정신력, 애국심이 투철한 647명이 선발되었습니다

육군정보학교에서 급조 교육을 받고 임시 군번과 계급을 받았죠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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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병단 편성을 위해 초빙된 채명신 중령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아마추어 부대들은 실전 투입할 수 없다.”

대원들은 신병 수준이었고, 게릴라전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습니다

채명신 중령은 결국 직접 11연대장에 지원하게 됩니다

12, 13연대는 대학생이나 의용경찰 출신자들이 지휘관으로 선발되었죠

그리고 ‘백골’이라는 이름

이것은 11연대가 첫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채명신 중령이 3개 연대를 통합 지휘하며 붙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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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백골이 되겠다는 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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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30일, 11연대를 시작으로 실전 투입이 시작됩니다

그들이 향한 곳은 강원도 북방 산악지대

그곳에는 김일성의 최측근 최현 중장이 이끄는 군단과 105전차여단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북한 사단 이름으로 남아있는 류경수가 지휘하는 군단까지,

총 2개 군단이 포진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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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혹독한 추위까지

그들은 북한군 무기와 장비로 위장하고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2주치 미숫가루만 들고

아마추어라 평가받았던 백골병단은 놀라운 전과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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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산된 적 소부대 전멸

– 검문소를 설치해 지나가는 북한군 관료들 처치 및 정보 획득

– 획득한 정보로 수도사단이 적군 대규모 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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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장 큰 전과

김일성이 만든 남파유격대를 조기에 식별하고 수뇌부 전원 생포

생포된 인원 중에는 빨치산 총사령관 김원팔 중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생포했던 포로 한 명이 탈출합니다

백골병단은 적의 추격을 예상했고

어려운 결정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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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은 포로들을 전원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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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예상대로 북한군이 추격해 옵니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60일간의 혈투가 시작됩니다

11연대 2대대장 윤창규 대위는 전투 중 부상을 입습니다

전우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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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스로 적에게 다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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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 새끼들아! 내가 대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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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포하려 다가온 적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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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강원 북부 산악지대에서 60일간 320km를 이동했습니다

3월 30일, 전선이 북상하며 추격이 멈췄고,

북진하던 국군 7사단과 조우하며 긴 전투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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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고위간부 13명 생포

– 480여 명의 북한군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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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통신 교란 및 첩보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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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647명 중 364명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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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돌아온 용사들을 기다린 것은 포상이 아니었습니다

백골병단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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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충격적인 것은 군번과 계급이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전역한 사람들은 미필 상태로 남게 되었고,

다시 입대해서 군복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채명신 장군은 육군본부에 항의했지만, 육본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당연히 유가족들도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지옥을 다녀온 용사들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만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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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은 힘을 모아 백골병단 전적비 건립을 승인받습니다

2004년, 53년 만에 국회에서 법률안이 통과됩니다

‘적 후방지역 작전수행 공로자에 대한 군복무인정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정말 미치도록 늦었지만

생존자들은 계급과 군번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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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25일, 육군본부 대연병장

59년 만의 전역식이 열렸습니다

이미 수많은 전우들은 먼저 떠났고, 단 26명만이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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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돈 육군참모총장의 말:

“백골병단 선배들께 오늘에야 전역증을 드리게 돼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늦었지만 최고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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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병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누볐던 곳은 후예들이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바로 703특공연대입니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산화한 용사들을 기억해주십시오

[군가] 제6보병 사단가 (The 6th Infantry Division) / 6사단가

제6보병 사단가 (The 6th Infantry Di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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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영문 작사 / 김동진 작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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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맹호의 기세로 싸우고 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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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기 선두에 이름을 떨치며

강철로 뭉쳐진 6사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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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청성기를 높이 날리며

부르자 우렁차게 우리의 개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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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불을 가리랴 우리는 용감히 싸운다

6사단! 6사단! 대한의 6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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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내 겨레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악랄한 오랑캐 휘몰아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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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의 용문산 적들을 소탕한

전공에 빛나는 6사단이다

​

승리의 청성기를 높이 날리며

부르자 우렁차게 우리의 개가를

​

물과 불을 가리랴 우리는 용감히 싸운다

6사단! 6사단! 대한의 6사단

​

3절)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내 조국

삼천리 강산에 방패가 되어

​

생명을 바쳐서 오늘도 싸우는

백전백승의 6사단이다

​

승리의 청성기를 높이 날리며

부르자 우렁차게 우리의 개가를

​

물과 불을 가리랴 우리는 용감히 싸운다

6사단! 6사단! 대한의 6사단

[군가] 제2보병사단가(제2신속대응사단가) / 노도부대

제2보병사단가(제2신속대응사단가) / 노도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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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금수강산 수도에서 한뜻에 뭉쳐

조국의 통일 위해 노도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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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의 괴뢰군을 쳐무찌르니

장하다 그의 이름 2사단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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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사명산 정기받아 굳게 뭉쳤다

초전박살 굳센신념 노도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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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의 전기연마 전진 또 전진

산악의 천하무적 2사단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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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선진 조국 힘찬 대열 선봉에 서서

조국통일 겨레 소망 노도와 같이

​

백두산 상봉까지 쳐서무찔러

내 조국 지키리라 2사단 용사

[군가] 육군 제22보병사단 (율곡부대)

육군 제22보병사단 (율곡부대)

대륙 땅 주름잡던 우리 겨레

힘찬 기상 이어받은 율곡 부대

민족의 통일 대업 가슴에 안고

전진의 깃발아래 뭉친 너와 나

전선의 최북단 이 땅을 지키고

내 부모 내 형제 내 조국 위해

적진을 쳐부순다 멸공통일 그 날까지

아아아 우리들은 대한의 건아

승리 향해 전진하는 22사단

[군가] 나를 넘는다 (Overcoming Myself) / 박효신

나를 넘는다 (Overcoming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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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 : 심재희

작곡 : 김형석

노래 : 박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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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흙먼지 마시며

붉은 태양에 온몸이 타도

달려왔다 견뎌왔다 단하나 소망으로

세찬 눈보라 속에서

나를 막는 시련을

부딪칠때면 다짐했다

불가능이란 없다고

많은 방황들과 고민들 속에

해매었지만

좀더 강한 날위한 연습인걸

젊음의 열정으로 자 시작이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

가슴 뜨겁게 참아낸 이 눈물이

감히 헛되지 않도록

숨이 차오를 만큼 함께 달려간다

세상앞에 당당하게

열번 넘어져 열두번 일어나도

절대 멈춰 서지 않아 나는 할수 있어

끝도 없는 칼 가누며

눈물 섞인 땀방울 닦아 낼때도

니가 있어 나에게 힘이 되었다

때론 너무 지처

주저앉고도 싶었지만

더 큰 세상을 위해 달려 갈래

젊음의 열정으로 자 시작이다

두번 다시 태어난다

가슴 뜨겁게 참아낸 이 눈물이

감히 헛되지 않도록

숨이 차오를 만큼 함께 달려간다

세상앞에 당당하게

열번 넘어져 열두번 일어나도

절대 멈춰 서지않아

아름다운 내일을 그려본다

보고싶은 내사람아

간절한 마음 날 위한 기도가

감히 헛되지 않도록

숨이 차 오를만큼 함께 달려간다

두번다시 태어난 나

푸른 가슴에 꿈들을 가득담아

더욱 높이 날아올라

더 멋진 미래로 오늘도 나를 넘는다

6.25전쟁. 상기하지! 잊지 말자





1950년 6월 25일.

삼팔선 이남 땅이 평화의 잠들고 있던 일요일 새벽.

북괴 공산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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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침 사흘만인 6월28일 서울은 짓밟혔습니다.

이때 우리는 탱크가 한 대도 없었음은 물론, 치안유지에 필요한 10만 미만의 국군이 있었는데 반해, 북괴는 탱크 242대 등 중무장한 20만 병력으로 남침해 왔습니다.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아닌 밤중에 도적을 만난 서울 시민들은 허겁지겁 피난을 갔습니다. 집과 재산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붉은 무리의 탱크는 후퇴하는 국군을 쫓아 한강을 건너 쳐내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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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이리 때에 짓밟힌 서울.

한강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미처 피난 못간 시민들은 강제노동의 죽을 고생을 하고, 6.25 이전에 공산당을 거부한 자유민주의 지식인들이나 종교인들은 반동 분자라 해서 인민재판이라는 허울 속에 무차별 학살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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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무방비 상태에 온 남한 땅은 경상도 땅 일부를 제외하고, 무참하게 유린데 갔습니다. 한 달 만에 놈들은 대구 북쪽까지 쳐내려왔고, 피난민들은 숨 돌릴 새도 없이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몰려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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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포항.

아군의 낙동강 방어선 안에 있던 동해안에 이곳 포항으로 공산군은 이른바 8월 총공세를 퍼부었습니다.

시가지는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해수욕장이던 이 해변에서 피난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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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지금 포항 종합 제철이 들어선 자리입니다.

여기는 서울의 용산역 일대, 그때의 염춘교 굴다리.

그해 9월 아군은 서울을 수복했으나 서울은 거의 폐허가 돼 있었습니다.

그 해 압록강까지 북진한 아군은 중공군을 만나다시 후퇴를 했고, 해가 바뀐 1951년 1월 4일.

또다시 서울을 비우고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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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은 1.4후퇴.

6.25 직전 설마 북쪽 공산당이 쳐내려 오겠느냐면서 무방비 상태로 자유만을 외치다가 당한 비극 앞에 사람들은 울며 불며 한강을 건넜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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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당시 영등포역.

무턱대고 남쪽으로 가는 피난열차에 오른 사람들 짐짝처럼 포개지고 또 포개졌습니다. 이름도 서러운 일사후퇴에 추위에 떠는 아기를 체온으로 감싸주는 어머니, 그리고 어린 자식을 기관차에 매달고가는 아버지의 마음.

눈물조차 메마른 피난 길, 오직 살아야 한다는 한 가닥 몸부림 속에 기차는 떠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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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그 당시의 흥남부두.

해방 이후 줄곧 공산학정에 시달리든 20여만 북한 동포들이 피난 길에 올랐습니다. 난리통 부모의 손을 놓쳐 버린 어린 형제 부모는 아이를 찾고, 아이들은 어버이를 찾다가 울면서 돌아서야 했던 눈물의 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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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은 유별나게 춥고 눈도 많이 내렸습니다.

남의 힘만 믿고 잘사는 남의 나라 흉내만 내면서 자유만을 누리기에 바빴던 그 말 많던 애국자들은 어디로 가고 말없이 살아온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런 가시밭길을 가야만 했는가.

삼팔선을 100리 길 지척에 두고도이 땅에 전쟁은 결코 없다든 무책임한 그 당시 지도층 때문에 착한 국민들은 이렇게 날벼락을 당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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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이 어린이들.

나라의 정세를 그릇 판단한 어른들의 잘못 철없는 아이들에게 이렇게도 가슴 아픈 상처를 새겨 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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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웠던 피난 생활.

아이들은 피난 학교에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러나 책상도 걸상도 없었습니다. 책조차 없이 뙤약볕 아래서 선생님의 입만 쳐다보며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또 나무 그늘 아래서 배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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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당시 대구의 고려대학교.

대학은 판잣집이나 천막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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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이화여자대학교.

나라의 안전 보장 없이는 배움 그 자체가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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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책가방 대신 총대를 메고 싸웠던가 나라를 지키겠다고 전선에 나가 싸우다가 이름 없이 죽어간 많은 학생들, 그리고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 학교를 찾아온 학우들.

말도 많고 수도 많던 그 숱한 애국자들은 다 어디로 가고, 여기 젊은이들만이 애써 싸우다 피를 쏟고, 이렇게 몸 다쳐 누워 있는 것인지 떳떳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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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가는 곳마다 폐허뿐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가 약 20만, 남편을 잃은 여인은 무려 40여 만, 공산당에 끌려갔거나 학살된 사람이 근 30만에 이르렀습니다. 이 참혹한 땅 위에 이름 없는 죽음들이 산을 이루었습니다. 혈육을 찾아 헤매는 가족들의 오혈과 통곡 산도 울고 강도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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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우리에게 무방비 상태의 자유는 침략과 압제를 스스로 불러들이며 힘이 없는 정의는 불의의 노예가 된다는 교훈을 남겨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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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이 지난 지금 휴전선에 땅굴을 파내려오면서 겉으로는 평화를 내세우는 북한 괴뢰들 우리는 이 6.25의 폐허를 되돌아보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힘을 모아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 나가야 되겠습니다.

[군가] 제36보병사단가 (백호부대)





​36사단가 (백호부대)
36th Infantry Division

1절

태백산 정기뻗은 씩씩한 백호(白虎)

우리의 끓는 피가 용솟음친다

정의의 깃발을 펄럭이면서

앞으로 앞으로 용진(勇進) 또 용진

백호용사 가는 길엔 승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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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단군의 성혈(聖血)받은 씩씩한 백호

애국의 끓는 피가 용솟음친다

정의의 총칼을 번쩍이면서

앞으로 앞으로 찌르고 또 찔러

백호용사 가는 길엔 승리가 있다.

[군가] 두고간 전선

 

– 두고간 전선 –

작사 금나영
작곡 김리학
노래 : 채희정

(1절)
나 아니면 그 누가 싸워이기랴
한 목숨이 지더라도 슬퍼 말아라
다짐하던 그 눈빛에 전진 또 전진
승리만이 그대의 자랑이었네
산천초목 진동하던 팔부능선에
또 한번 큰 함성이 울리던 그날
웃으면서 눈감은 나의 전우여
두고간 이 전선에 봄이 오누나

(2절)
몸 하나가 죽어서 이긴다면은
천만번을 죽어라도 이기리라던
그 목소리 그 다짐이 울리고 울려
이 강산에 오늘도 자유가 산다
푸르고도 뜨거운 젊은 넋이여
그 높고 큰 사랑을 어이 잊으랴
하늘 땅에 사무친 그대 노래를
두고간 이 전선에 꽃이 피누나